http://www.youtube.com/watch?v=VdtW_I_CTAA&feature=youtu.be
저는 조셉 킴 입니다.
북한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저희 가족은 항상 가난에 시달렸지만
저는 언제나 사랑과 관심을 가장 많이 받았어요.
외아들이고 막내였거든요.
제가 네 살이었던 1994년에
북한에 대 기근이 닥쳤습니다.
그래서 누나와 저는 새벽 5시부터 땔감을 찾아다녔고
자정이 넘어서 돌아오곤 했습니다.
제 아홉 번째 생일에 부모님은
아무런 음식도 주지 못하셨습니다.
당시 저는 아이였지만
부모님 마음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시기에 100만 명 이상의 북한주민이 아사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13살이 되던 해
제 아버지도 같은 운명을 맞이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말라가고 결국엔 돌아가시는 모습을 지켜봤어요.
같은 해에 어느 날 어머니가 갑자기 사라지셨고
누나는 저에게 돈을 벌러 중국에 간다며
돈과 음식을 가지고 곧 돌아오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누나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떨어져 지낸 적이 없었고
영원히 함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누나가 떠날 때 전 안아주지도 않았어요.
그건 제 생애 최대의 실수였습니다.
그렇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그렇게 오래 헤어질 줄 몰랐어요.
그 이후 저는 어머니나 누나를 본 적이 없어요.
순식간에 저는 집 없는 고아가 돼버렸습니다.
일상은 아주 힘들어졌지만
동시에 매우 단순해졌어요.
쓰레기통에서 먼지투성이의
빵조각을 찾는 게 목표가 되었죠.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구걸 또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암시장의 식품 수레에서 먹을 걸 훔치기 시작했습니다.
어떨 땐 소일거리를 해주는 대신 음식을 받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겨울에 두 달 동안 탄광에서 일 했는데
아무런 보호 장비 없이 지하 33미터 되는 곳에서
하루 최대 16시간 씩 일을 하기도 했죠.
하지만 제가 특별한 건 아니었어요.
많은 다른 고아들도 저와 같거나
혹은 이보다 더한 방식으로 살아남았습니다.
너무 춥거나 배가 고파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에는
다음 날 아침에 누나가 돌아와 저를 깨우며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가져오기를 바랐습니다.
그런 희망이 저를 살렸습니다.
큰 거창한 희망 아니라, 제가 말하는 희망은
다음 쓰레기통에는 빵이 있을 거라는 믿음이 준 희망입니다.
빵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할 지라도요.
하지만 그런 믿음 없이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테고
그러면 저는 죽고 말았겠죠.
저는 매일 같이 다짐 했습니다.
삶이 아무리 힘들어질지라도 나는 살아야 한다고요.
누나가 돌아오기를 3년이나 기다린 끝에
전 중국에 직접 가서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방식으로는
오래 못 갈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죠.
가는 길이 위험한 줄 알았지만
어떤 선택을 하든 목숨이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였어요.
북한에서 아버지처럼 굶어 죽거나
아니면 중국으로 탈출해서
더 나은 삶은 찾아보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발각되지 않기 위해
밤에 국경을 넘기 위한 시도를 한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북한 국경경비대는
허가 없이 국경을 넘으려는 사람들을 총으로 쏘아 죽입니다.
중국 공산당은 탈북자들을 잡으면 송환하고
그럼 다시 돌려보내진 사람들은
무거운 처벌을 받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낮에 국경을 넘기로 했습니다.
이유는 딱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그땐 아직 어려서 어두운 게 무서웠고
둘째는 어차피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데
낮에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많지 않으니까
경비대의 눈에 띄지 않고 탈북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리고 전 2006년 2월 15일에 중국 땅을 밟았습니다.
당시 16살 이었죠.
중국에 가면 상황이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일단은 먹을거리가 더 많을 테니까요.
더 많은 사람들이 저를 도와 줄 거라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삶은 북한에서보다 더 어려웠습니다.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이죠.
혹시 잡혀서 북한에 돌려보내질까 항상 초조했습니다.
하지만 몇 달 후 기적처럼
탈북자들을 위해 비밀 보호소를 운영하는 사람을 만나
그곳에서 살면서 수년 만에 처음으로 정기적으로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말 한 활동가의 도움으로
중국을 탈출해 난민 자격으로 미국에 오게 됐어요.
영어 한마디도 못하는 채로 미국에 왔지만
제 사회복지사는 제가 고등학교에 가야한다고 했어요.
사실 북한에서도 저는 늘 꼴찌였어요.
초등학교도 간신이 마쳤고 하루에 한번 싸움질을 했어요.
저는 교과서나 도서관 체질이 아니었죠.
아버지께서는 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여러 수를 쓰셨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죠.
그러다가 어느 순간 포기하셨어요.
'넌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하셨어요.
12살 밖에 안 됐었지만 큰 상처를 받았는데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까지도
공부에 대한 동기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미국까지 와서 고등학교에 가야 한다는 사실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중학교도 안다녔는데 말이에요.
결국 가야 한다고 하니까 가기는 했는데
별로 열심히 다니지는 않았어요.
그러다가 하루는 집에 돌아왔는데
양어머니께서 닭 날개 요리를 해줬어요.
저녁식사 중에 닭 날개를 하나 더 먹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더 못 먹을까봐 안 먹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제 접시를 보니 양아버지께서
자신을 것을 갖다 놓으신 겁니다.
정말 행복했어요.
양아버지께서 제 옆에 앉아 계셨는데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았지만
아주 따뜻한 눈길로 저를 바라보셨습니다.
갑자기 저의 친아버지가 생각났어요.
양아버지의 작은 사랑의 행동이
제 아버지를 생각나게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낌없이 제게 음식을 나눠주셨습니다.
자신이 배고프거나 굶주리실 때도 말이죠.
저는 미국에서 이렇게 많은 음식을 먹고 있는데
제 아버지께서는 기아로 돌아가셨다는 사실에 숨이 막혔습니다.
그날 밤 제 유일한 소원은
아버지께 밥상을 차려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를 기릴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있을지 궁리해보았습니다.
그래서 다다른 결론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미국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을 받아
아버지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말아야겠다는 거였어요.
그 이후 학교를 열심히 다니기 시작했고
생애 처음으로 성적우수상을 받았어요.
그리고 고등학교 첫 학기에 우등생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됐죠.
그 닭 날개 하나에 인생이 바뀐 거죠.
희망은 개인적인 겁니다.
희망이란 그 누구도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이란 걸 믿기로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해요.
스스로 일구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북한에서는 혼자 살아남았지만
미국까지 저를 데려온 것은 희망이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미국에 오니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너무 많은 자유가 주어졌거든요.
그렇지만 그날의 저녁식사 때
양아버지는 제게 방향을 제시해 주셨고
미국에서 살아야 할 동기와 목적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저는 혼자의 힘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닙니다.
희망이 있었지만 희망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데에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생존을 스스로에게 강요해야 하고
생존하기 위해 희망도 필요하지만
도움 없이 혼자 해낼 순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여러분께 하고 싶은 말입니다.
스스로를 위해 희망을 가지면서도 서로 도와주세요.
어디에 살든 삶은 힘들 수 있습니다
양아버지는 제 삶을 바꾸려는 의도가 있었던 게 아니잖아요.
이 처럼 여러분도 사랑에서 비롯된 작은 행동으로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 있습니다.
빵 한 조각은 배고픔을 달랠 수 있고
희망을 가지면 목숨을 연명할 빵을 찾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확신하건데 여러분의 따뜻한 손길과 관심은
또 다른 조셉의 목숨을 살릴 수도 있고
생존의 희망을 가진 수천 명의
또 다른 조셉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도 있습니다.